인연

May 10th, 2009

어쩌다 생각나서 백만년만에 포스팅 하나.

살다보면 인연이라고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오늘 내가 이 친구를 만난 순간이 그랬다.

나는 작은 노트북들의 광팬이며, 적어도 3-4년 전까지만 해도 1kg이 넘어가는 놈들은 노트북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가장 중요한 노트북의 기준은 키보드이므로 이 기준을 만족시킬 수 있는 노트북은 내가 노트북을 처음 알게된 순간부터 지금까지도 세상에 몇 대 존재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도시바 리브레또 L시리즈와 후지쯔의 P시리즈, JVC의 airworks시리즈 정도를 들 수 있는데 그나마도 이제는 넷북에 밀려 나오기도 어려운 제품이다. 나는 원체 CPU는 별로 관심이 없다보니 넷북도 관계는 없는데 넷북치고 1kg 넘지 않는 모델 찾기 쉽지 않더라. 좀 가벼우면 쓸만한 키보드를 갖춘 제품이 없고.
지금까지 내가 사용했던 노트북 중에서 가장 만족스러웠던 제품은 리브레또 L5 였다. 좀 느리고 답답하긴 했지만 L2와 L5는 내 인생에서 가장 생산적이었던 시간을 함께 했던 녀석들이고 정말 많은 일을 해주었던 녀석들이다.
한동안 노트북을 잊고 살다가 2년 전에 정말 심심해서 어느 일요일, X60T라는 희대의 걸물을 -그냥- 샀다. 다만 이 때부터는 IBM이 IBM이 아니더라. 그리고는 솔직히 정말로 쓸 일은 없었지만 아주 심미적인 만족감이라는 차원에서 맥북과 맥북 에어를 차례로 질러놓고 구석에 처박아두고 살았다. 다들 실용적인 관점에서 내 기준에 부합하는 노트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맥북 시리즈는 예쁘다.
작년 어느날 드디어 L2를 닮은 노트북을 찾았으니 이름하여 바이오P라고 하더라. 무척 가지고 싶었는데 제품이 나오지 않길래 몇개월간 잊고 살았다. 잊고 살다보니 제품이 나와도 그냥 한참 잊고 살았다.  잊고 살다보니 별로 보고 싶은 생각도 들질 않더라.

오늘 저녁 참치를 오물오물 씹는 사이에 문득 이 놈이 떠올랐다. 계속 잊혀지질 않아 집에 들어와서 잠시 중고장터를 살펴보았을 뿐인데 우리 동네에 사는 누군가가 바로 팔고 계시더라. 밤 10시가 넘은 시간이었는데 검색에서 구입까지 30분이 걸렸다.

이런 것을 우리는 인연이라고 한다.

박스를 받자마자 투박한 골판지가 눈에 들어왔다. 애플 빠돌이가 되면 포장을 보는 눈도 고급이 되어서 이런 촌티가 줄줄 흐르는 포장은 마음에 들지 않게 마련이다. 소니 노트북들이 대부분 그렇지만 포장을 뜯을수록 처절하고 구차한 종이 퍼즐이 안스럽다. 그래. 내 동종업계 인간이니 다 이해한다. 포장에 돈들여서 마진 깎아먹기 싫은 마음 다 안다. 이해해줄께. 니들도 복잡하고 힘든 내부 사정 많은거 어찌 모르겠누. 애플 놈들이 별종인게지.
노트북을 여니 흐뭇한 키보드가 보이는 것도 잠시 안스럽게 깨알같은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어쩌겠누. 아쉬운 내가 참고 살련다.
포인터에 손을 올리자마자 옛날에는 없으면 못살 것 같던 그 포인터가 불편해 죽을 지경이다. 에어에서 쓰던 멀티터치가 그립다. 이런 제길. 애플이 사람 다 버려놨다. 그래도 키보드에 손을 얹으니 다시 흐뭇해진다. 이런 무게에  이런 키피치가 되는 키보드를 가진 놈은 모바일프로7xx밖에 없었다.

그래서 흐뭇하다. 얼마나 쓸지는 몰라도 일단은 80점짜리 흐뭇한 지름이다.

민트패드에 대한 생각 - Life Logger

November 23rd, 2008

얼마전 민트패드가 출시되자마자 질러버렸다. 사실 요즘은 새로운 제품을 보아도 전부 비슷한 기능에 비슷한 외관을 가지고 있어서 별로 설레는 마음이 들지도 않고 그다지 구입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일부러 몇백대 한정판매하는 제품을 질러버린 것은 요 몇 달간 심각하게 인생의 회의에 묻혀 있는 서글픈 샐러리맨의 애환을 달래보고자 하는 열망뿐이었으니, 바꿔말하면 스트레스 해소용 쇼핑 정도 되시겠다. 내 취향에 맞는 아이템들은 아니지만 어쨌든 나는 female들이 백화점에서 쇼핑하며 울적한 마음을 달래는 심리를 135%정도 이해할 수 있다. 그 시작이 어찌되었건간에 자그만한 전자제품들은 개인적으로건 커리어에서건 내 인생의 한 축을 이루어오는 아이템이기 때문에 꽤 여러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쳐간다.

시간 참 잘도 흘러가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도 꽤 오랜 시간이 흐른 포스팅 중에는 내가 블로그에 사진을 넣기 싫은 이유 라는 것이 있는데 민트패드는 어찌되었건 이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아이템 중의 하나이다. 다만 1.3메가짜리로는 요즘 같은 세상에 살아남기 힘든 것은 어쩔 수 없다. 정작 만든 사람들이야 이 정도면 메모 플러스 신변잡기용으로 충분하지 않냐고 항변할 수 있고 - 내가 기획하더라도 현실적인 이유로 그리 했겠지만, 어쩄든 앉으면 눕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인지라 이 부분은 큰 약점이 된다. 내 상식 안에서는 여행을 떠나면서 이 놈을 들고가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오래 전에 태블릿PC에 푹 빠져있던 시절에 SaxyTabletBlogger라는 놈을 시험삼아 하나 만들어본 적이 있었는데, 이후로도 손으로 쓴 메모의 업로드는 항상 내게는 디지털 가젯의 로망과도 같은 것이었고 사실 민트패드를 지르게 된 큰 이유 중의 하나도 이 얿로드가 실제로 구현되었을 때의 사용자 경험이 어떤 것인지 체험해보고 싶어서이기도 하다. 필기에는 확실히 타이핑된 그 이상의 따숩은 느낌이 있다. 다만 실제로는 민트패드 정도의 크기와 감압식 터치로는 이 느낌을 흉내낼 수는 있을지언정 태블릿 PC에서 주는 그 자유로운 글쓰기의 느낌을 경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런 저런 느낌을 종합해볼 때 실제로 일과 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메모가 가능한 최상의 디바이스는 7인치 정도의 태블릿 기기들이 아닐까 싶다. 이제라도 슬슬 나올 때가 되었는데 왜 아직 나오질 않는건지. 게다가 이 정도의 사이즈로 구성되는 디바이스와 민트패드 블로그를 사용해본 느낌으로는 제대로 된 노트를 할 수 없다보니 결국 좋겠다 내지는 멋져요 정도의 잡담 이상의 포스팅이 불가능한 비전문가적인 가벼운 social network이 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민트패드의 지향점 중의 하나인 디지털 수첩으로 실제 사용하는 것은 - 물론 사용자 나름이겠지만 - 거의 불가능하고 아마 호기심을 넘은 단계가 되면 대부분의 사용자들이 민트패드의 메모 기능은 별로 쓸만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 솔직한 느낌이다. 게다가 사소한 문제이고 아직 구현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사진과 메모와 보이스노트를 하나의 주제로 통합할 수 있는 기능도 없을 뿐 더러 사진위에 프리핸드 노트를 할 수 있는 방법도 없다. 메모 디바이스를 표방한다면 메모의 큰 축인 사진, 보이스, 프리핸드의 세가지를 바로 사용할 수 있는 하드웨어 버튼이 있는 것이 옳은 방향이었을 것 같은데 그렇지도 못하다.

민트패드의 기능을 종합해볼 때 요 녀석은 사진과 메모와 보이스레코더를 통합한 라이프로거 디바이스라고 할 수 있겠는데, 라이프로거가 되려면 아직 카테고리와 타임라인의 개념이 좀 더 필요해 보인다. 무엇보다도 라이프로거가 되기 위한 제 1조건은 항상 휴대가 가능해야 한다는 것인데, 지금까지 등장한 제품 중에서, 그리고 앞으로 등장할 제품 모두에서도 이 조건을 충족시키는 제품은 휴대폰밖에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mp3플레이어나 디지털카메라가 아직 살아남아 있는 것은 휴대폰이 이 놈들을 대체할만큼 아직 진화하지 못했던 것일 뿐 두 제품은 모두 앞으로 살아남기 힘들다. 살아남는다고 하면 mp3는 휴대폰에서 재료비를 따져볼 때 감히 넣을 수 없는 정말 대용량의 제품이거나 정말 작은 액세서리 제품 뿐이 될 것이며 - 그나마 대용량의 제품은 스토리지의 숫자가 큰 의미가 없는 어느 변곡점 (에를 들면 128GB or 256GB?)에 이르면 소멸할 것이다. 카메라의 경우는 휴대폰이 어쩌지 못하는 렌즈, 센서와 같은 부품의 문제가 있는데 이 것도 어느 변곡점까지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장기적으로 볼때 카메라는 DSLR과 같은 전문가 제품이 아니면 모두 휴대폰에 흡수되기 십상이다. 국내만 하더라도 휴대폰에 3.5mm 이어폰잭이 포함되는 순간 mp3플레이어는 시장의 상당부분을 잃게 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민트패드가 독립된 디바이스로 생존할 수 있는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

현재의 민트패드와 민트패스는 정말 어중간한 제품이다. 음악을 듣기에도, 동영상을 보기에도, 사진을 찍기에도 적합하지 않은 말 그대로 디버전스 시대의 컨버전스 제품이지만 1-2GB정도의 메모리에 별로 부족함을 느끼지 않은 캐주얼한 음악 감상 패턴에 사이월드 정도의 소셜 네트웍에서 충분한 만족감을 느끼는 사용자에게는 어필할 수 있는 제품이겠다. 다만 이런 류의 사용자는 대부분 10대후반-20대초반의 아가씨들인 경우가 많은데 민트패드와 같은 골수 얼리 아이템은 잘 알지도 못하고 알 수도 없는 생활 패턴을 가지고 있다는 슬픔이 있다.

그렇다면 민트패스가 앞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어떤 것이 있을까?
장기적으로 볼 때 민트패드와 같은 디바이스는 살아남을 수 없는 제품이지만 (물론 대부분의 전자제품의 PLC는 채 1년이 되지 못하지만), 분명히 방향은 틀리지 않은 것이리라. 다만 이런 기능은 제대로 특화된 디지털 카메라에 흡수되거나, 확실히 어중간한 컨버전스로 가고 있는 핸드폰으로 흡수되는 것이 옳은 방향이다. 사용자는 이 정도의 기능을 위하여 다른 제품을 하나 더 가지고 다닐 수 있을 정도로 관대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또한 메모에 대해서는 아직 제대로 캐치하고 있는 제조사 (라기 보다는 제조사의 상품기획자들)이 얼마 없을 것 같아보이지만 - 터치폰 기획이 정당화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은 아이폰 덕분이 아니겠나 - 어쨌든 사진의 공유는 이제 좀 더 일반화되어 가고 있는 개념이고 2-3년 안에는 제조사에서 서비스를 가지고 가는 형태와 통신사업자의 자체 서비스 두가지 모두의 형태로 지원되어 flickr, picasa, mobileme를 중심으로 온갖 제조사, 사업자들의 공유 플랫폼이 난무하는 지저분한 춘추전국 시대가 될 것이다. 이런 시대가 오기 전에 민트패스가 할 수 있는 일은 적어도 국내 최고의 소셜 네트웍이 되거나 민트패스 플랫폼 또는 회사를 통신 사업자에게 딜하는 것밖에 없어보인다. 어느 정도 사용자 기반이 확보된 상태에서 사용자를 포함한 사이트 전체를 포털에 넘기는 방법도 있겠지만 별로 가능성이 없어보인다.
지금의 민트패드에서는 디바이스 판매를 제외하면 별다른 수익모델이 보이지 않는데, 디바이스 판매만으로 보자면 아마도 5-7만대 수준이 손익 분기점이 되지 않을까 싶다. 최소한 월 5천대 이상은 판매가 되어야 가능할텐데 사진과 메모의 직접 업로드를 제외한 별다른 특징이 없이 이 정도의 판매가 가능할까는 앞으로 흥미있게 지켜볼만한 일이 될 것 같다.

어찌되었건, 우리나라에서 이런 매니악한 제품을 만드는 것은 민트패스가 아니었다면 어려운 일이다. 앞으로도 꼭 생존해서 좀 더 얼리스러운 제품들을 보여주기를 그리고 약삭빠른 사업전략으로 이 흐뭇한 서비스의 맥이 끊기지 않도록 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나의 아침, 또는 처절한 투쟁

October 29th, 2008

나의 아침은 Bose dock에 꽂혀 있는 아이팟에서 들려오는 음악과 함께 우아하게 시작된다 - 라고 말할 수 있으면 정말 행복하겠지만 - 나의 아침은 전쟁이다.

나는 타고난 올빼미로 지금껏 길들여져왔고, 아마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나의 취침 시간은 보통 새벽 두시경이며 아마 앞으로도 크게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아마도 오랜 코딩노가다맨으로 살아온 내 인생의 궤적과 깊은 연관이 있을 것이지만, 어쩄든 지금은 이런 생활 방식에 익숙해져 더 일찍 잠을 잔다는 것은 웬지 인생의 낭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다만, 내가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는 - 자그마치 4년이나 다니고 있는 이 회사는 아침형 인간의 생활 방식을 강요하는 곳인데 게다가 집에서 멀기까지 하다. 플러스 알파로 출근 시간에 지독하게 엄격하기도 하다. 제 시간에 출근을 할 수 있는 마지노선인 기상 시각은 오전 여섯시 반이다. 이 시간이 최대로 허락할 수 있는 시간이다. 결국 내게 주어진 수면시간은 네시간 반인 셈인데, 나는 잠이 많기까지 하다. 비극의 시작이로세.

내가 잠들기 전 잊지 않고 꼭 하는 일은 bose dock의 볼륨이 최대로 높여진 상태인지 확인하는 것과, 버기한 아이팟 클래식의 알람을 다시 맞추는 일이다. 이놈의 아이팟은 믿을 수가 없어서 제 멋대로 알람이 지워진다거나, 울려야 할 시간에 제대로 울리지 않는 일이 일상다반사이다. 그리고 내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알람을 다시 한 번씩 확인한다. 그리고 양치질을 하고 불을 끈다. 그러면 어지러웠던 하루의 끝과 함께 전쟁같은 아침의 시작이다.

먼저 아이팟이 듣자마자 일어날 수 밖에 없는 볼륨으로 울린다. bose dock을 써본 사람은 알지어다. 그 스피커의 최대 볼륨이 어떤 소리인지. 나는 자연스레 일어나 아이팟의 pause를 누르고 침대에 기대앉는다. 그리고 눈이 감긴다. 2-3분후에는 핸드폰에서 알람이 울린다. 3분마다 몇 번씩 울려주는데 비몽사몽 상태인 나는 이 빽빽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어느 사이 잠들고 있다. 잠시후에는 침대 머리맡에 있는 포토프레임에서 다시 알람이 울린다. 다만 전자 제품에서 나는 알람이란 대체 믿을 수 없는 고주파 사운드들이 대부분이고 내 귀는 타고난 하이패스필터. 잠시후에는 따르릉거리는 기계식 알람시계가 울리고 다시 아이팟터치에서 삑삑대는 소리가 울린다. 잠시후에는 알람으로 전락한 모바일프로가 울어댄다.

이쯤되면 정신이 들만도 한데 아직도 나는 멍한 상태로 겨우 욕실문을 열고 씻는둥 마는둥 얼굴에 물만 간신히 묻힌 채로 주섬주섬 옷을 챙긴다. 아침에 옷을 고를 여유따위는 없다. 옷은 미리 밤에 준비해두어야 하는 아이템이다.

그리고 아직도 잠이 덜깬 눈으로 집을 나선다. 넘어지고 걷지 않는 것이 대견스럽다. 이리하여 어찌어찌 회사로 가는 버스에 앉으면 그제야 나는 안도하고 다시 눈을 붙이는 것이다.

아. 나의 아침은 전쟁이로다.

아침형 인간이 되면 안될까? 글쎄. 그렇게 타고난 걸 어쩌겠수.
이렇게 몇 달 만에 블로깅에 겨우 잡설이나 끄적대는 나는 이제 잠을 자야 하는 것이다. 또 처절한 아침의 시작이다. 수면은 하루의 끝이 아니라 일어나기 위한 처절한 투쟁의 시작인 것이다.

애플이 앞으로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

April 1st, 2008

잡스의 2008년 키노트는 사실 그전만큼 임팩트가 크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애플에 무언가 새로운 것을 기대하는 입장에서 맥북에어 한 가지로는 이전의 새로운 아이팟 라인업이나 아이폰같은 충격을 받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일지도 모른다. 다만 애플은 잡스가 복귀한 이후 첫 아이팟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해마다 새로운 것을 계속 발표하면서 제품의 라인업을 확장해왔고, 이 라인업을 잘 살펴보면 애플이 이후에 무엇을 할 것인지 - 또는 할 수 있을 것인지 추측해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애플이 2008년 맥월드에서 발표한 것은 타입캡슐, 아이폰과 아이팟터치 업그레이드, 아이튠스 무비렌탈, 맥북 에어의 네가지였다. 여기에서 새로운 제품군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타임캡슐과 맥북에어 정도라고 할 수 있는데, 맥북에어는 아이북 이후에 비어있던 애플의 서브노트북 제품군을 보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2008년 맥월드에서 발표한 것들 - 2007년에 했던 일은 지금까지 했던 일을 보완하는 종류의 일이라고 할 수 있으며 새로운 종류의 비즈니스를 창출하는 일을 하지는 못했다는 의미가 된다.

애플은 이전 몇 년간 지속적으로 라인업을 확장해왔으며 크다고는 할 수 없는 애플의 규모로 볼 때 이미 감당하기 힘들 만큼의 제품들을 갖추고 있다. 현재의 규모로는 지금까지의 사업을 유지하기에도 힘에 벅찰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 애플의 제품군

현재 애플이 가지고 있는 제품의 라인업은 전통적으로 포트폴리오에 포함되어 왔던 서버와 데스크탑, 노트북 제품 및 모바일 제품군인 아이폰, 아이팟류 + 아이튠스 스토어 및 appletv, 그리고 이 제품들의 액세서리로 이루어진다.

애플은 지금까지 컴퓨터 솔루션 기반의 회사에서 출발해 전통적인 가전 제품의 영역 중 모바일 AV제품군을 성공적으로 런칭한 것이고, appletv는 여기에서 쌓인 컨텐츠 자산 및 에코시스템을 기반으로 홈 AV제품군을 런칭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이튠스 스토어가 전략적으로 중요한 포지션을 점할 수 밖에 없는 것이 모든 컨텐츠를 집합시켜 컴퓨터 회사에서 가전 회사로 포지션을 이동시킬 수 있는 피벗 역할을 해 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애플은 이제 컴퓨터 쪽에서는 서버 (Xserver), 데스크탑(iMac), 서브 노트북 (macbook air), 보급형 노트북 (Macbook), 고급형 노트북(Macbook Pro)를 모두 갖추었고, 모바일 제품군에서는 전화 (iPhone), AV player(iPod Shuffle, Nano, Classic, Touch)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홈AV제품군을 차지하려는 시도(appletv)로 하고 있다. 이번의 appletv업데이트는 컴퓨터 및 모바일 제품군에만 결합되어 있던 기존의 아이튠스 플랫폼에 홈 제품군을 결합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 제품이 더 발전하면 셋탑 박스및 IPTV에 직접적으로 위협이 되는 제품이 될 수 밖에 없다. 내 눈에는 podcast와 IPTV가 다른 것이 하나도 없어보인다.

인간이 즐길 수 있는 엔터테인먼트는 단방향의 것으로 보는 것과 듣는 것, 읽는 것이 있으며 상호작용이 있는 것으로는 컴퓨터 게임이나 운동류가 있을 수 있는데, 컴퓨터 게임쪽은 애플이 진입하기에는 아직까지는 거의 불가능한 사업이고,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것은 읽는 것이 있을테니 이북의 호스팅도 가능성이 없다고 말하기는 힘들겠다. 다만 아마존같은 워낙 강력한 라이벌이 눈독을 들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니 앞으로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그렇다면 애플이 이제 더 진출할 수 있는 제품군으로 남은 것은 모바일과 컴퓨터 제품 사이에 남아 있는 것들 - 최근의 UMPC로 통칭되는 휴대용 컴퓨터정도가 있을텐데, 사실 이 녀석이 크게 메리트가 있는 사업인지, 또는 당장 메리트가 없어도 앞으로 성장성이 있는 사업인지는 판단하기가 어렵다. 완전한 모바일과 휴대가 힘든 노트북 사이의 갭을 연결하는 제품류가 기존의 모바일에 비해 사용자에게 얼마나 많은 benefit을 줄 수 있을지는 앞으로의 디자인에 달려 있는 것이니.

다만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 한가지는, 애플이 지금까지 innovation의 대명사처럼 여겨져왔고, 지금까지 잘 해 온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부터는 이렇게 혁신적인 일을 하는 것이 그다지 간단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조금 더 쥐어짜면 2-3년 정도는 새로운 것들을 계속 내놓을 수 있겠지만, 이제는 애플이 할 수 있는 일이 기존의 것들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것말고는 그다지 많이 남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충분히 몇 년 더 돈을 벌 수 있는 토대는 충분히 마련되었으니 당분간은 잘 먹고 잘 살 것 같아 보인다.

애플제품의 경쟁력에 대한 생각

February 16th, 2008

“중국산”인 얇은 미디어 플레이어와 역시 중국산인 2.5파운드의 13.3인치 노트북 이 있다. 그런 것이다. 애플에서 만들 수 있는 것을 다른 곳에서 만들 수 없을리가 없다. 적어도 기술의 관점에서는 그렇다.
다만, 이 미디어 플레이어는 가격이 낮긴 하겠지만 2기가와 4기가 버전 밖에 없는데, 당분간 더 이상의 용량으로 확장되기는 어렵다고 느껴진다. 아마 8기가정도는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제대로 가격을 맞추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에 중국산의 특성상 출시되기가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애플의 가격 정책은 모든 제품 라인업에서 항상 좀 더 나은 사양을 이전과 같은 가격으로 제공하는 방식인데 아이팟을 생각해보면 플래시 기반의 제품은 2008년 1월 현재로서는 8기가와 16기가가 주요한 라인업을 형성하고 있는 것에 반해 다른 제조사에서는 4기가에서 8기가를 기반으로 라인업을 꾸민다. 이것은 현재 낸드 플래시의 수급 상황이 4기가에서 8기가를 꾸밀 수 있는 부품들이 주요 라인업이 되어 있다는 의미인데 보통 2기가나 4기가 정도의 단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상의 용량을 제공하는 라인업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수준 이상의 물량을 개런티할 수 없으면 손해를 보지 않는 한은 소비자가 납득할만한 가격으로 제품을 출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제조업이란 제대로 규모의 경제가 실현되는 업종으로 고정비 덕분에 많이 팔면 팔수록 가격이 낮아질 수 있는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물량을 개런티할 수 있다는 것은 부품업체에서도 그만큼 제품을 싸게 공급받을 수 있다는 의미이고, 제조업체의 입장에서도 그만큼 더 단가를 낮출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이렇다보니 일차적으로 용량 싸움인 mp3플레이어의 경우 현재 상황에서 다른 제조업체들이 애플을 따라잡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드디스크 타입을 보더라도 80기가 이상의 제품을 판매하는 곳은 애플이 유일하다. 다른 업체에서는 - 아마 모르긴 몰라도 그 이상의 부품을 단가를 맞출 수 있는 수준에서 구할 수 없을 뿐 더러 이런 대용량의 제품은 아주 폐인스러운 제품이기 때문에 구할 수 있어도 라인업에서 제외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이 사실은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도 가능한데, 대부분의 캐주얼한 사용자들에게는 8기가 이상의 용량이 크게 의미가 없는 경우가 많으므로 - 앞으로도 용량 싸움은 계속 되겠지만 - 현재의 플래시 뮤직플레이어 제품군의 기본 용량이 8-16기가 또는 16-32기가 수준으로 변하는 약 1년 정도 후에도 아이팟이 용량이라는 관점에서 사용자에게 어필할만한 가치를 가지게 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애플은 충실히 제품간의 에코시스템을 꾸며가고 있고, 아이팟에 와이파이와 블루투스가 탑재되기 시작하면 현재로서는 iTunes, Frontrow정도이지만 앞으로 제대로 등장할 AppleTV와 또 다른 다크호스로 보이는 TimeCapsule까지 포함한 시스템에 경쟁할 수 있는 조합은 당분간 나타나기 힘들지 않을까. 게다가 애플이 시네마디스플레이에 AppleTV를 합친 제품을 내놓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나.
모바일과 홈AV시장에서는 용량싸움이 일단락된 후부터는 Connectivity의 싸움이 될 수밖에 없다. 아직은 그나마 다른 섹터로 분리되어 있는 모바일과 홈AV제품군들이 서로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통합되기 시작하면 애플은 더욱 큰 헤게모니를 주도하게 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 동네에서 애플을 따라잡기는 참 어려운 것이, 작은 업체들은 그 자체로 혁신적인 제품을 만들 수는 있지만 규모의 경제를 이룰 수 없고, 에코시스템을 꾸밀 수 없으며, 큰 업체들은 애플만큼 전략적으로, 기민하게 움직이는 곳이 없어보인다. 물론 큰 업체들은 애플이 앞으로 무슨 짓을 할지 예측한다고 하더라도 기존의 거래선과 매출구조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마음대로 움직이기도 어렵다. 쓸데없이 라인업이 많기도 하고.
그러고보면 애플의 라인업은 각각의 제품이 명확한 타겟 마켓을 가지고 있고, 군더더기같은 사양들이 별로 없어 얄미울 정도로 잘 디자인했다는 느낌이 절로 든다. 애플의 라인업에는 모호하게 중복된 제품이 하나도 없다. 정말 훌륭하다. 애플의 UI디자이너 - not graphics - 와 상품기획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정말 한 번 만나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