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May 10th, 2009
어쩌다 생각나서 백만년만에 포스팅 하나.
살다보면 인연이라고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오늘 내가 이 친구를 만난 순간이 그랬다.
나는 작은 노트북들의 광팬이며, 적어도 3-4년 전까지만 해도 1kg이 넘어가는 놈들은 노트북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가장 중요한 노트북의 기준은 키보드이므로 이 기준을 만족시킬 수 있는 노트북은 내가 노트북을 처음 알게된 순간부터 지금까지도 세상에 몇 대 존재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도시바 리브레또 L시리즈와 후지쯔의 P시리즈, JVC의 airworks시리즈 정도를 들 수 있는데 그나마도 이제는 넷북에 밀려 나오기도 어려운 제품이다. 나는 원체 CPU는 별로 관심이 없다보니 넷북도 관계는 없는데 넷북치고 1kg 넘지 않는 모델 찾기 쉽지 않더라. 좀 가벼우면 쓸만한 키보드를 갖춘 제품이 없고.
지금까지 내가 사용했던 노트북 중에서 가장 만족스러웠던 제품은 리브레또 L5 였다. 좀 느리고 답답하긴 했지만 L2와 L5는 내 인생에서 가장 생산적이었던 시간을 함께 했던 녀석들이고 정말 많은 일을 해주었던 녀석들이다.
한동안 노트북을 잊고 살다가 2년 전에 정말 심심해서 어느 일요일, X60T라는 희대의 걸물을 -그냥- 샀다. 다만 이 때부터는 IBM이 IBM이 아니더라. 그리고는 솔직히 정말로 쓸 일은 없었지만 아주 심미적인 만족감이라는 차원에서 맥북과 맥북 에어를 차례로 질러놓고 구석에 처박아두고 살았다. 다들 실용적인 관점에서 내 기준에 부합하는 노트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맥북 시리즈는 예쁘다.
작년 어느날 드디어 L2를 닮은 노트북을 찾았으니 이름하여 바이오P라고 하더라. 무척 가지고 싶었는데 제품이 나오지 않길래 몇개월간 잊고 살았다. 잊고 살다보니 제품이 나와도 그냥 한참 잊고 살았다. 잊고 살다보니 별로 보고 싶은 생각도 들질 않더라.
오늘 저녁 참치를 오물오물 씹는 사이에 문득 이 놈이 떠올랐다. 계속 잊혀지질 않아 집에 들어와서 잠시 중고장터를 살펴보았을 뿐인데 우리 동네에 사는 누군가가 바로 팔고 계시더라. 밤 10시가 넘은 시간이었는데 검색에서 구입까지 30분이 걸렸다.
이런 것을 우리는 인연이라고 한다.
박스를 받자마자 투박한 골판지가 눈에 들어왔다. 애플 빠돌이가 되면 포장을 보는 눈도 고급이 되어서 이런 촌티가 줄줄 흐르는 포장은 마음에 들지 않게 마련이다. 소니 노트북들이 대부분 그렇지만 포장을 뜯을수록 처절하고 구차한 종이 퍼즐이 안스럽다. 그래. 내 동종업계 인간이니 다 이해한다. 포장에 돈들여서 마진 깎아먹기 싫은 마음 다 안다. 이해해줄께. 니들도 복잡하고 힘든 내부 사정 많은거 어찌 모르겠누. 애플 놈들이 별종인게지.
노트북을 여니 흐뭇한 키보드가 보이는 것도 잠시 안스럽게 깨알같은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어쩌겠누. 아쉬운 내가 참고 살련다.
포인터에 손을 올리자마자 옛날에는 없으면 못살 것 같던 그 포인터가 불편해 죽을 지경이다. 에어에서 쓰던 멀티터치가 그립다. 이런 제길. 애플이 사람 다 버려놨다. 그래도 키보드에 손을 얹으니 다시 흐뭇해진다. 이런 무게에 이런 키피치가 되는 키보드를 가진 놈은 모바일프로7xx밖에 없었다.
그래서 흐뭇하다. 얼마나 쓸지는 몰라도 일단은 80점짜리 흐뭇한 지름이다.
